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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집카테고리 없음 2022. 9. 5. 19:56
그 방은 다행히 비어 있었다. 그는 그동안 오롯이 자신으로 채워질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창문을 닫지 못한 채 환성이 지나갈 때까지 방류되었다. 오랜 시간 자신을 팔아 이제 겨우 사색을 장만한 셈이다. 짐을 풀어놓다 들랑거리는 햇살이 의심스러워 주위를 둘러보니 낡은 천과 압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의자를 밟고 올라 낡은 천으로 창문을 가리려다 압정으로 천을 너무 세게 누르는 바람에 실수로 압정 한 개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는 바닥에 발을 살포시 디뎠지만 발바닥에 전달된 체중은 어느 때보다 무겁게 느껴졌고 무사히 안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릎까지 소름이 돋았다. 그는 자세를 낮춰 이리저리 압정을 찾아보았지만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그의 것을 이리 밀고 저리 치워 더듬더듬 바닥을 쓰다듬어 보아도 압정은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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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카테고리 없음 2020. 8. 14. 07:12
해거름에 들려줄 고결한 고백 찬란하게 빛 날 그날의 선율을 위해 그는 모든 젊음을 피아노와 맞바꾼다. 누지지도 그렇다고 메마르지 않게 빚어낸 가문비나무의 기운 아이의 첫걸음으로 그려내는 순백한 현의 떨림 둥지를 감싸는 어미 새의 품처럼 포근한 헤머 하늘로 떠오르던 날 공명을 기억하는 향판 하지만 석양은 새벽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광명을 경외하던 혜성은 온기를 버리고 잠을 청하러 떠났다. 그는 손길을 내려놓지 않는다. 향기로운 고삐를 거역하는 프레임 온기를 더듬거리며 선상을 지키는 건반 봄볕에 잠들다 봄석이 벗기고 봄빛으로 단장하던 사이 혜성은 백발의 호수가 되었고 까마귀는 수십 번 백로를 떠나보냈다. 발차를 알리는 종소리가 윤곽이 드러내자 그는 소란스럽게 의자를 내려치고 자신의 다리를 주물렀다. 거듭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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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의 전쟁카테고리 없음 2020. 1. 17. 01:19
여왕벌은 분노에 빠졌다. 수확해 놓은 꿀 대부분을 인간들이 가져갔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는 더욱 심해 벌집을 전부 수탈당하는 상황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여왕벌은 원로들을 소집하여 긴급회의를 열었다. 겨울을 대비에 모아놓은 꿀과 유충에게 주어야 할 로열제리 마저 빼앗겨 설탕물로 연명할 것을 생각하자 원로들도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다. 회의가 끝나자 외교 벌들이 인간들과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인간들과 협상을 벌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간들은 자릿세 명목이며 합당한 거래라는 단호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좁혀지지 않는 의견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여왕벌은 왕국 설립 이래 최대 결정을 하게 된다. 결국 벌들은 파업을 선언했다. 봉식이는 1개월 된 일벌이다. 오늘도 봉식이는 동료들과 긴 낮잠으로 시간을 때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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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의 침묵카테고리 없음 2020. 1. 17. 01:05
므릉의 양들은 정착하지 않는다. 쉼 없이 유회 하여도 다다르지 못할 광활한 초원 되돌아오는 길을 잃은 요란한 풍경을 다독이며, 므릉의 양들은 잠잠히 풀빛 위에 구름을 그린다. 그해 처음 음산한 한기가 불어오던 밤 갑자기 어미 양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목양자는 다급히 공기총을 들고 울음소리를 향해 뛰쳐나갔다. 어미 양을 향해 불을 비추자 늑대가 어린 양을 물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목양자는 도망치는 늑대를 향해 총을 겨누었지만 늑대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날 밤 달빛은 매정하게 잔잔했다. 날이 밝아오자 목양자는 공기총을 들고 늑대의 흔적을 좇았다. 늑대의 발자국과 어린 양의 핏자국이 멈춘 곳은 늑대굴이었다. 그는 조심스레 늑대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가죽만 남은 어린 양의 사체와 늑대 새끼들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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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설카테고리 없음 2020. 1. 17. 01:00
영원히 함께 있기로 약속한 연인이 있었다. 그녀는 생기 있는 미소를 품고 잠이 들어있고, 그는 그녀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미소에는 분명 온기가 남아 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다. 무력하게 관망하던 그는 그녀와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도록 달라며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조금씩 시들기 시작했다. 신이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여긴 그는 그녀의 보존을 위해 마을에서 가장 신묘하다는 술가를 찾아가 물었다. “그녀가 시들고 있습니다. 그녀와 영원히 공존할 수 있도록 주문을 걸어주세요.” 술가는 지긋이 눈을 감고 한참을 정적에 빠지다 입을 열었다. “그런 주문은 없네.” “그럼 다른 방법은 없나요?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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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콘테스트카테고리 없음 2020. 1. 17. 00:52
고양이 콘테스트가 열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양이를 뽑는 대회이다. 세계 각국에 수많은 종류의 고양이가 참가하였다. 고양이 미모에 폭발적인 관심으로 콘테스트는 전 세계에 실시간 중계되기까지 하였다. 제1회 우승은 태국의 샤미즈가 차지하였다. 샤미즈의 파란 눈은 심사위원의 마음을 매혹시켰고, 그중 가장 짙은 파란 눈을 가진 샤미즈가 우승을 하였다. 대회 이후 샤미즈의 파란 눈은 세계적인 유행이 되었고, 고양이를 가진 주인들은 자신의 고양이를 파란 눈으로 성형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파란 눈의 유행이 식기 전에 제2회 고양이 콘테스트가 열렸다. 한층 높아진 경쟁 속에 우승 고양이는 미국의 뱅갈고양이가 차지하였다. 야생의 기운이 느껴지는 표범무늬가 심사위원의 마음을 흔든 것이다. 그러자 표범무늬 염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