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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은 다행히 비어 있었다.
그는 그동안 오롯이 자신으로 채워질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창문을 닫지 못한 채 환성이 지나갈 때까지 방류되었다.
오랜 시간 자신을 팔아 이제 겨우 사색을 장만한 셈이다.
짐을 풀어놓다 들랑거리는 햇살이 의심스러워 주위를 둘러보니
낡은 천과 압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의자를 밟고 올라 낡은 천으로 창문을 가리려다 압정으로 천을 너무 세게 누르는 바람에 실수로
압정 한 개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는 바닥에 발을 살포시 디뎠지만 발바닥에 전달된 체중은 어느 때보다 무겁게 느껴졌고
무사히 안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릎까지 소름이 돋았다.
그는 자세를 낮춰 이리저리 압정을 찾아보았지만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그의 것을 이리 밀고 저리 치워 더듬더듬 바닥을 쓰다듬어 보아도
압정은 어딘가에 숨어 우스꽝스러운 그의 모습을 관음 하는 듯했다..
그렇게 낡은 천은 실미지근하게 창문을 반쯤만 가려주었다.
며칠이 지나도 압정은 나올 기미가 없었다.
제멋대로 늘어놓은 그의 것에 숨어 더욱더 찾기 어려웠다.
그는 압정에 찔리는 통증이 두려워 사소한 걸음도 신경이 쓰였다.
녀석은 일부러 숨어 있다 그가 방심한 틈을 타 상처를 줄게 분명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을 그 녀석을 두려워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연스레 그 방에 들어가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어느 순간 그는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또다시 방류되었다.
그 방에 들어가지 않으면 압정을 찾을 일도 상처를 받을 일도 없으니 차라리 후련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마지못해 창문을 열고 환성을 듣는 일상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불확실한 통증보다 익숙한 고통을 삼키며 감내하는 시간을 현실이라 부르는지도 모른다.
그는 문득 방안에 희미하지만 중요한 것을 두고 온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기억을 이리저리 뒤적거려도 생각이 나지 않자 그는 용기 내어 확인해 보기로 한다.
쫓기듯 쫓았던 지금은 잠자고 있을 꿈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방문을 열어보았다.
해방을 그리던 설렘은 으늑하게 먼지를 덮고 죽음처럼 담담하게 멈춰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미안했다.
압정을 마주하는 것보다 방치된 내 것을 들추는 게 더 힘들었다.
그는 차라리 이곳에 벗어나고 싶었다.
온전한 곳을 찾아 다시 시작한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환성도 사라 질 것 같았다.
결국 그는 그곳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그는 어질러진 자신의 것을 상자에 담기 시작했다.
노여움과 원망으로 그를 기다려준 자신의 것들을 겸연쩍게 어루만진다.
그렇게 꿈들은 상자에 담긴 채 결국 짐이 되어 나온다.
짐은 생각보다 많았다.
자신의 손으로 채운 것을 기계적으로 우겨 담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흔적들과 마주치자 애틋함이 불편하게 몰려왔다.
그럼에도 오로지 이곳에서 나가면 자신의 것들이 자신을 용서해 줄 것 같은 기분만 들었다.
그렇게 그 방은 또다시 비워져 갔다.
공허한 만큼 빈 공간이 커지자 수치스러운 소음들이 크게 울려 그를 괴롭혔다.
낡은 천이 들어 있는 마지막 상자는 이 방을 여백으로 꾸며주는 최후의 잔해처럼 볼품없이 단념하고 있었다.
이마저도 제거되면 허루한 이 방은 아무것도 아닐 것만 같았다.
허탈한 손길로 상자를 드는 순간 그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압정.
전부 드려내니 보이는 것은 너무도 초라한 손톱만한 쇠붙이.
녀석은 그가 외겁하는 순간을 좌표로 표시하듯 바닥에 박혀있었다.
날카로운 바늘 대신 넓적한 등을 그에게 보인 것을 보니
처음부터 압정은 그에게 관심도 없었다.
공포는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존재한다고 무서운 것은 아니다.
공포가 무서운 것은 지대하게 관심 주는 만큼 어쩌면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알 수 없는 안색 띠고 비로소 선명한 사색을 갖는다.
그는 더 이상 두려울 곳 없는 이 방을 영원히 떠나지 않기로 한다.
그가 가진 시간이 언젠가 종료되더라도
압정이 찍어준 좌표를 찾아 다시 이곳을 찾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그 방은 영원히 채워졌다.
[Circle] 합판에 타카핀,아크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