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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릉의 양들은 정착하지 않는다.
쉼 없이 유회 하여도 다다르지 못할 광활한 초원
되돌아오는 길을 잃은 요란한 풍경을 다독이며,
므릉의 양들은 잠잠히 풀빛 위에 구름을 그린다.
그해 처음 음산한 한기가 불어오던 밤 갑자기 어미 양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목양자는 다급히 공기총을 들고 울음소리를 향해 뛰쳐나갔다.
어미 양을 향해 불을 비추자 늑대가 어린 양을 물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목양자는 도망치는 늑대를 향해 총을 겨누었지만 늑대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날 밤 달빛은 매정하게 잔잔했다.
날이 밝아오자 목양자는 공기총을 들고 늑대의 흔적을 좇았다.
늑대의 발자국과 어린 양의 핏자국이 멈춘 곳은 늑대굴이었다.
그는 조심스레 늑대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가죽만 남은 어린 양의 사체와 늑대 새끼들뿐 어린 양을 물어간 어미 늑대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앙갚음으로 어린 늑대 한 마리만 사살하였다.
그가 다시 목장으로 돌아올 때쯤 므릉의 초원에는 새끼 잃은 어미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울음소리가 잠잠해지자 다시 밤이 찾아왔다.
목양자는 복수를 위안 삼아 편히 잠이 들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평화를 산산조각 내듯 어미 양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늑대가 다시 침입하여 어린 양을 공격한 것이다.
목양자의 복수에 분개한 늑대는 이번에는 어린 양 두 마리를 물어 죽었고
심지어 사체를 가져가지도 않았다.
다음날 목양자는 다시 늑대굴로 향했다.
이번에는 어미 늑대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새끼들을 지키고 있었다.
목양자가 나타나자 어미 늑대는 살기 가득한 굉음과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목양자의 총이 더 빨랐다.
거대한 총성과 함께 어미 늑대는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목양자는 어미 늑대를 죽이지 않았다. 다리를 겨냥해 움직일 수 없게 부상만 입혔다.
목양자는 어미 늑대가 보는 앞에서 어린 늑대 한 마리를 총으로 겨냥해 사살하였다.
어미 늑대는 저항할 수 없었다.
목양자가 다른 어린 늑대에게 총구를 돌리자 어미 늑대는 흐느끼며 울었다.
목양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고 어린 늑대 한 마리가 더 사살되었다.
목양자는 어미 늑대가 느끼는 비참함을 즐겼다.
총구를 어린 늑대들에게 이리저리 겨냥하며 어미 늑대를 농락하였다.
하지만 더는 사살하지는 않았다.
정확히 늑대가 죽인 어린 양의 숫자만큼만 죽인 그는 완벽한 앙갚음이라 생각하고 목장으로 돌아왔다.
늑대는 며칠간 밤을 새우며 격분에 찬 소리로 울었다.
그러자 다른 초원에 있던 늑대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 울음소리는 다른 초원의 늑대를 불러 모으는 소리였다.
늑대는 무리를 모아 늑대군단을 만들어 복수를 계획했다.
수십 마리의 늑대들이 모이자 늑대군단은 무서운 기세로 므릉의 양들을 향해 돌격했다.
목양자는 공기총으로 늑대군단을 막아 보려 했지만 많은 수의 늑대들을 홀로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늑대군단은 어린 양들만 골라 사정없이 물어 죽였다. 이에 저항하던 어미 양들은 큰 부상을 입었다.
짐승에게 자비는 없었다.
결국 므릉의 어린 양들은 모두 죽었다.
복수를 달성한 늑대군단은 환희로 가득 찬 소리를 부르짖으며 되돌아갔다.
목양자는 되돌아가는 늑대군단의 뒤쫓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늑대들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고, 목장과 너무 떨어진 느낌은 받은 그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나지막이 보이는 어미 양들을 바라보았다.
어미 양들은 자신의 새끼를 죽이고 되돌아가는 늑대들을 쫓지 않았다.
목양자는 습격 도중 자신이 쏜 총에 맞아 부상당한 늑대 한 마리를 끌고 와 어미 양들 앞에 던졌다.
눈앞에 자신의 새끼를 죽인 늑대를 보고도 어미 양들은 아무 행동을 하지 않았다.
목양자는 새끼 잃은 양들에게 물었다.
“왜 복수하지 않는가?”
양들은 말이 없었다.
목양자는 부상당한 늑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다음날 목양자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늑대와의 전투를 선포하였다.
므릉의 어린 양들의 사체를 본 마을 사람들은 그의 선언에 동조했고, 늑대 섬멸을 위해 각자의 무기로 무장하였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과 늑대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격노에 찬 목양자를 선두로 마을 사람들은 늑대군단의 진지에 쳐들어갔다.
늑대들은 그들의 총알과 화약을 당해 내지 못하고 하나둘씩 쓰려졌다.
이대로 마을 사람들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으나, 늑대들은 다른 초원에 있는 그리고 또 다른 초원들의 늑대들까지 불러 모아 반격에 나셨다. 금방 끝날 듯했던 전투는 긴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겨울이 다가오고 늑대군단과 마을 사람은 모두 지쳐 있었다.
불안한 냉기가 서서히 밀려올 때쯤 늑대군단이 위기가 찾아왔다. 더는 불러 모을 늑대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서서히 늑대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마지막 힘을 다해 늑대군단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 늑대군단은 그들의 공세에 밀려 한계에 다다르자 마을 사람들은 곧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상대해야 할 상대는 늑대군단뿐만이 아니었다.
겨울이 엄습하자 극심한 한파가 몰려와 마을 사람 대부분은 동상에 걸려 격전지에서 버티는 것조차 힘에 겨웠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늑대를 뚫을 총이 있었지만, 자신을 보호해 줄 겉이 없었다.
두꺼운 털을 가진 늑대군단은 마을 사람들의 기동력이 떨어지는 것을 발견하였고, 부상자가 즐비한 마을 사람들을 무참히 공격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다시 마을로 후퇴하여야만 했다.
참담한 패배에 사기가 떨어진 마을 사람들을 위해 목양자는 큰 결심을 했다.
그는 므릉에 남아 있는 어미 양들의 털을 모두 잘라 추위를 막을 전투복을 만들었다.
어미 양들은 늑대에게 습격받을 때처럼 그에게 자신의 털을 내주어야만 했다.
양들은 설한풍 속에 앙상한 살가죽만 드러낸 채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었다.
목양자는 양털로 만든 전투복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승리를 맹세했다.
그렇게 전투는 다시 시작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양털로 만든 전투복을 입고 독살스러운 총성을 내지르며 늑대군단을 향해 돌진하였다.
늑대의 눈에는 침묵 잃은 어미 양이 보였다.
마침내 늑대군단은 패배하였다. 하지만 목양자는 살생은 멈추지 않았다.
짐승에게 자비는 없었다.
최후의 늑대마저 처단한 그는 포효하였다. 그는 마치 늑대 같았다.
그렇게 그해 겨울이 끝나기도 전에 늑대들은 전멸하였다.
그리고 므릉의 양들도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했다.
<공멸> 털실에 섬유직물물감, 아크릴물감